한편, 한성도읍기말 고구려의 평양 천도 후 가속화된 남진정책으로 위기에 봉착한 백제는 신라와 고구려간의 냉각기를 틈타 이전까지 적대관계에 있었던 신라와 나제동맹(羅濟同盟, 433)을 맺어 고구려의 압력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한성도읍기 말기에 조성된 이와 같은 신라와의 화친 분위기는 웅진천도 이후에는 공수동맹, 결혼동맹 등으로 이어져 더욱 강화되었다.
신라와 빈번해진 교류의 징표는 주로 웅진도읍기의 왕족 무덤인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과 이와 비슷한 시기 경주의 왕묘급 무덤이나 지방의 수장묘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가운데 신라지역에서 출토되는 원두대도, 장식도자, 용문환두대도, 귀걸이를 비롯한 무령왕릉계 장신구류, 등은 백제로부터의 영향인 것으로 신라와의 활발한 교류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그런데 신라지역의 경우 백제 문물은 신라 도읍인 경주지역에서도 출토되지만, 오히려 창녕지방과 같은 신라의 변경, 즉 대가야 접경지역의 수장묘에서 많이 보인다.
따라서 백제는 신라와 직접적인 교류도 하였지만 가야 수장들을 통한 간접적인 교류도 빈번하게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신라지역에서 다종, 다양한 백제의 문물들이 많이 보이는데 비해 백제지역에서 신라 문물이 그다지 많이 보이지 않음은 백제의 대 신라 교류가 훨씬 적극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