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의 시원은 선사시대의 시대별 분류 중 대개 유라시아에 대하여 사용되는 시대 개념인 중석기시대로부터 시작 됩니다. 이 시대 인류의 생활 특징은 수렵, 어로, 채취 등 획득경제에 의존하여 생활하게 되는데, 주로 강가를 중심으로 그 생활무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중석기시대의 유적은 우리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공주석장리의 선사유적입니다.
구석기시대의 생활은 주로 채집과 수렵에 의존하였습니다. 특히,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협동이 필요했을 것이고, 따라서, 일정 규모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석장리의 집자리유적이 8~10명 정도의 인원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점을 통해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조직의 구체적인 모습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사람이나 동물을 조각한 유물이 보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인들의 예술활동을 추측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활동은 주로 주술적인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공주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유물들을 통해 당시 이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유적의 존재는 1964년 5월 홍수에 의해 강둑이 무너짐으로써 확인되었으며,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1964년 11월 22일에 처음 이루어진 이후 1974년까지 10년간에 걸쳐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과 1992년에 11,12차 조사가 추가로 실시되었습니다. 그 결과, 불모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구석기문화의 체계를 세워 놓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구석기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석장리유적은 제1·2지구로 나뉘는데, 1지구에서는 후기 집터 층에서 2만 8천년 전과 그 아래층에서 3만 6백년전의 연대가 밝혀졌습니다. 2지구에서는 절대연대가 밝혀진 것은 없으나 여러 층위에서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의 석기 제작기술은 외날찍개, 양날찍개, 이른 주먹도끼, 발달된 주먹도끼 및 격지긁개,돌날석기,새기개,좀돌날등의 단계를 거쳐 발달하였습니다.
조사 결과, 석장리유적은 전기 구석기부터 후기 구석기까지 형성된 문화층으로 밝혀졌습니다. 맨 아래층의 외날찍개 문화층은 암반층인 석비레층 위에 바로 쌓인 층으로, 제2빙하기인 55~45만년 전 사이에 이루어진 층이고, 2문화층은 제3빙하기인 35~32만년전 사이, 3·4문화층은 21만년 전의 제3빙하기 뒤쪽으로, 5문화층은 18만년전의 빙하기, 6문화층은 제3간빙기인 12만년경 전으로 각각 추정됩니다. 중기구석기 성격을 지닌 자갈돌 찍개 문화층은 따뜻한 기후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아래쪽의 찰흙층에서 산화철이 굳어서 이루어진 뿌리테가 나왔습니다. 이 층의 석기들은 아슐리앙 전통의 주먹도끼, 돌려떼기 수법의 몸돌, 격지돌이 있어, 7만~6만년 전 쯤으로 추정됩니다. 8·9문화층은 제4빙하기에 이루어진 6만~5만년 전으로, 10·11문화층은 3~2만년 전으로 각각 추정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