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해안가나 큰 강가, 해안에서 가까운 섬 등 주로 물가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적에서는 낚시바늘, 어망추 등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적의 분포상과 출토유물로 보아 신석기인들은 어로생활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후가 계절적인 변화가 크기 때문에, 식량자원을 취득함에 있어서 그 영향을 많이 받는데, 강이나 바다에서는 지속적으로 식량자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수렵과 채집도 여전히 중요한 식량공급원이었으며, 특히, 수렵에 있어서 먼 거리까지 날아가는 화살의 사용은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식량 확보의 증대를 가져왔습니다.
신석기유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동삼동유적의 기원전 5,000년, 그 하한은 경기도 시도유적의 기원전 1,000년 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5,000~기원전 1,000년 경까지 약 4,000년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석기시대는 다시 전기, 중기, 후기의 3기로 구분되고 있습니다. 전기는 기원전 5,000~기원전 3,500년으로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인 빗살무늬토기가 사용되기 이전의 시기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주거지는 주로 해안 또는 강가의 사질토층을 50~100cm이상 파서 만든 수혈주거에서 생활하였습니다. 형태는 방형 또는 원형으로, 면적은 20㎡~30㎡이며, 화덕이 1~2개 설치되어 있습니다. 유물로는 작살과 낚시바늘, 어망추등이 다수 출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 어로생활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여기에 수렵, 채집활동을 병행하였던 시기였습니다.
중기는 기원전 2,000년~기원전 1,000년의 약 1,000년간으로 빗살무늬토기가 퇴화되어 변형되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서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농경이 시작되었습니다.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조 등이 농경도구와 함께 발견되었으며, 궁산리유적에서는 돌가래, 뿔가래, 동물의 이빨로 만든 낫등의 농경도구가 출토되어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점차 농경을 중심으로 한 생산경제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어로, 수렵에 의한 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석기유적에서 사슴, 노루, 멧돼지 등의 뼈가 출토되고, 도토리알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는 야생의 과일을 채집해 먹었음을 보여 준다. 또, 함께 발견되는 갈판은 도토리알이나 짐승의 고기 같은 것을 연하게 갈아먹는데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신석기시대의 주거지는 일정한 장소에서 여러 개가 함께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석기인들이 일정한 규모의 취락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들은 중요한 일은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처리하는 공동체생활을 하였을 것이며, 어로, 수렵, 농경 등의 생산 활동도 공동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혼인은 다른 씨족과 이루어졌으며, 또한 씨족간의 교역도 행하였습니다. 신앙으로는 우주만물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애니미즘이나 무격신앙 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미술은 대체로 추상적이면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